피로 물들인 조선 스릴러 <혈의 누> 프리 프로덕션의 비밀
[필름 2.0 2005-04-25 22:50]


5월 초 개봉하는 <혈의 누>는 역사적 사실과 창조적 상상력이 결합한 '팩션(faction)' 같은 영화다. 한국영화의 취약 장르인 스릴러를 사극과 접목시킨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시나리오와 프로덕션 디자인의 이모저모를 미리 살펴본다 

<혈의 누>는 여러모로 참신한 기획이 돋보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콤플렉스인 스릴러 장르에 돌파구를 뚫을지 모른다. 영민한 시나리오로 흥미진진한 추리의 즐거움과 오싹한 공포감을 선사하는 영화는 충무로에 거의 드물었다. 특히 이 장르의 창작 시나리오는 가물에 콩 나듯 했다. 몇몇 현대물이 있긴 했지만 관객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킨 것은 아니었다. 반면 <혈의 누>는 오리지널 창작 시나리오다. 심지어 그 만들기 어렵다는 사극이다. 19세기 초반, 전통 문화와 신문명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펼쳐지는 역동적인 드라마다. 제지업이 번성한 동화도라는 섬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수사하기 위해 군관 이원규(차승원)가 파견된다. 제지소를 소유하고 있는 사대부 김치성 대감(오현경)의 아들 김인권(박용우)은 이원규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마을 사람들은 천주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강 객주(천호진)의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믿는다. 강 객주를 따르던 화공 두호(지성)를 비롯해 제지소 안팎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혈의 누>는 2000년 ‘조선 후기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아이템으로 시작됐다. 신인 이원재 작가는 김성제 프로듀서(<피도 눈물도 없이>)와 함께 시나리오를 수없이 고쳤다. 2003년 김대승 감독이 합류한 뒤에는 디테일을 더욱 보강해 나갔다. 요즘 서점가의 트렌드인 팩션(faction)을 앞서 추진해온 것이다. <영원한 제국>이 떠오른다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혈의 누>는 <영원한 제국>보다 기획에서 성큼 앞서 나간다. <영원한 제국>은 이인화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혈의 누>는 100% 제작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영원한 제국>은 국사 연구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왕조사의 이면을 들춘다. 반면 <혈의 누>는 평범한 민초들이 발 붙이고 있는 땅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충돌하는 내용이다. 물론 <허준> <상도> <대장금> 같은 최근 TV 사극처럼 아기자기한 옛 일상 생활을 재연하는 것은 이 영화의 목표가 아니다. <혈의 누>에는 TV 사극이 다룰 수 없는 잔혹한 죽음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살인과 처형, 추적과 수사의 숨가쁜 드라마에 얽힌 숨겨진 유산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종이를 만들고 운반하며 땀 흘려 일했던 사람들과, 거기서 비롯된 탐욕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혈의 누> 모든 요소는 역사적 리얼리티와 창작자의 아이디어가 결합한 화학 작용에서 탄생했다. 영화의 기초를 다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덕션 디자이너. ‘말이 되는’ 이야기를 써낸 이원재 작가와 까다로운 시나리오를 놀라운 시각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민언옥 미술감독(<춘향뎐>)에게 창작의 비밀을 물었다.
극악 처형
<혈의 누>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웬만한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고어적인 육체 훼손 장면을 보여 준다. <쎄븐>이나 <장미의 이름>과 유사한 구성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역사 속의 살해 방법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이원재 작가는 ‘조선 시대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최초의 컨셉을 구현하면서 갖가지 피범벅 스토리를 고안했다. 천주교 신자인 이 작가는 대학 시절 절두산 등 성지 순례를 하면서 천주교도들이 잔학하게 처형당했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었다. 영화에는 다섯 가지 살인 방법이 등장한다. 모두 ‘대역죄인’으로 취급 받았던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했던 방식 그대로다. 먼저 ‘효시(梟示)’는 사형을 집행한 뒤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해 대역죄를 범한 죄수의 머리나 시체를 매달아 공중에 전시하는 참형 방법이다. ‘석형(石刑)’은 목에 동앗줄을 감아 잡아 당겨 돌담에 머리를 부딪혀 깨서 죽이는 것. ‘도모지(塗貌紙)’는 죄인의 발목과 손을 뒤로 묶고 한지를 얼굴에 붙인 뒤 물을 뿌려서 서서히 질식시키는 방법이다. ‘거열(車裂)’은 죄인의 사지를 네 방향의 밧줄로 묶은 뒤 소나 말이 이를 끌도록 만들어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가장 논란이 될 만한 것은 ‘육장(肉漿)’이다. 가마솥에 죄인을 집어넣고 불을 때서 삶아 죽이는 방법이다. 사실 조선시대에서 육장은 실제로 집행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전시 효과를 극대화해 백성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런 시늉만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시나리오에 묘사된 지문만 봐도 소름이 돋는다. 이원재 작가는 시나리오 초고 단계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잔혹한 상상력을 펼쳤다고 말한다. 실제 천주교도 처형 방법 중에는 더욱 끔찍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성지에 가면 커다란 돌이 있는데, 핏자국이 아직 남아 있다. 장정들이 사람의 양다리를 잡고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서 죽이듯 사람을 돌에 박아 깨뜨려 죽였던 거다.” 일본 B급 호러영화를 즐겨 보는 이원재 작가는 다양한 지옥도를 구상했다. “예전에는 미움을 받던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칼을 꽂았다고 한다. 그래서 죽은 강 객주의 무덤에 칼이 섬뜩한 형상으로 꽂혀 있고, 그것이 나중에 연쇄 살인 과정에서 재연되는 장면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 모니터 과정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들은 다소 순화됐다. 대중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는 수위를 조절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가장 잔혹한 순간은 아마도 피비가 내리는 장면일지 모른다.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에 맞먹는 사상 초유의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이원재 작가는 ‘피비(血雨)’라는 아이디어를 모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게임의 배경이 판타지라 좀비들이 나오는데, 날씨가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게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비가 내릴 때 치트 키를 사용했더니 피비로 바뀌는 게 아닌가. 영화에서 응용하면 장난이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피비가 내린다는 설정을 가지고 쓰기 시작했다.”
과학 수사
<혈의 누>의 이원규는 <슬리피 할로우>의 이카보드 크레인(조니 뎁)를 연상시킨다. 그는 목 없는 기사의 연쇄 살인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마을로 들어가 계몽적 이성에 바탕을 둔 추리력을 펼친다. 이원규 역시 강 객주의 원혼이 짓누르는 동화도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진행하려 애쓴다. 당시 조선에 막 들어오기 시작한 신기하고 새로운 문물을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군관의 수사에는 나름의 법칙과 절차가 있었다. 이원재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무원록 無寃錄>이라는 책을 참조했다고 말한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왕여(王與)가 송 나라의 형사 사건 지침서를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다. ‘억울함을 없게 하라’는 제목 그대로 살인사건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진상을 조사하는 데 활용되었던 책이다. 조선에서는 세종 시대에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영조 대에 이르러 조선의 상황에 알맞게 내용을 보강했고 정조가 이를 한글로 번역해 활용하도록 명했다.
이 작가는 TV 프로그램 <역사 스페셜>에서 <무원록>을 소개한 모 법의학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의학 서적 전문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을 어렵게 구했다(지금은 2003년 새로 발간된 <신조무원록>이라는 주해본이 시중에 판매되고 있다). 책에는 살인사건 조사에 대한 총설, 검시 도구와 절차, 보고서 작성 방식, 사망 원인 등이 자세하게 수록돼 있다. “온갖 종류의 죽음이 다 나온다. 익사, 자살, 질식사, 가스 중독 등등. 지금과 비교하자면 교통사고라고 할 만한, 마차나 말에 깔려 죽는 경우도 있다. 검시할 때는 서로 다른 사람이 두 번을 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너무 재미있고 놀라운 책이다.”
영화에서는 원규의 첫 검시 장면에 이 과정이 묘사돼 있다. 조협수로 시체를 깨끗이 닦고 모든 상처의 치수를 재고 시형도(屍形圖)를 그리고 시반(屍斑)의 위치로 사망 시간을 추정하는 것 등이다. 다양한 도구들도 동원된다. 이원재 작가는 조선 후기 과학 기술을 다룬 책들에서 당시 도입되었던 각종 일상 용품들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물건들은 이미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다. “천리경이나 안경은 기본이다. 화승총이 아니라 수발총도 이미 16세기에 조선에 들어왔는데, 보수적인 선비들이 사용을 반대했다고 한다. 원규는 시대를 앞서 나갔던 인물이고, 따라서 수발총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촬영장에서 시형도와 수발총을 마련하는 것은 민언옥 미술감독을 비롯한 미술팀과 소품팀의 몫이었다. 고증을 바탕으로 구해오거나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새로 제작했다. 동화도 사람들이 종이를 만들고 운반하는 데 사용한 기구와 도구들도 다양한 기술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포구 마을과 배
이원재 작가의 최초 시놉시스는 내륙 지방이 배경이었다. 제지업 대신 상업과 금융업이 등장하고, 군관 대신 암행어사가 사건을 파헤친다는 내용이었다. 뭍이 아니라 섬으로 배경을 옮기자는 아이디어는 김성제 프로듀서가 내놓았다. 외부인의 접근이 어렵고 위험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으며 부(富)를 통해 인간의 탐욕과 잔혹성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민언옥 미술감독은 동화도라는 가상 공간을 영화에 알맞게 구성하고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동원해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일을 해나갔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 뒤졌지만 알맞은 장소에는 모두 현대적인 포구 마을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을 세트를 짓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포구에 들어서는 순간 현실 세계와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우글거리는 욕망으로 인해 황폐해진 상황을 보여 줘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상보다는 심리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게 더 중요했다.”
민언옥 감독은 심리적인 장소로서 동화도의 지도를 만들었다. 포구 마을 디자인에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인 캐스퍼 데이빗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그림을 참조했다. “황량하면서도 상징적이고,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스토리가 있는 그림”이었다. 여수에 만든 포구 마을 세트는 한국적이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 섬마을의 좁은 지형에 알맞은 초가집을 지었지만 특정 지방의 가옥 형태를 따르지는 않았다. 지붕의 모양도 반듯하게 자르는 대신 초가가 비쭉비쭉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구체적인 생활상을 반영하지 않는 대신 기다란 장대를 꽂거나 그물과 어구를 걸어 거친 느낌을 강조했다. “집이 땅을 무겁게 짓누르는 에너지와 장대가 하늘로 치솟는 에너지가 서로 부딪히도록” 만든 것이다. 공포 스릴러인데도 불구하고 낮 장면이 많기 때문에 적절한 색조를 찾는 것도 큰 과제였다. “바닥에 물기 하나 없이 가문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불에 타버린 듯한 색, 폭염에 갇혀서 탄 듯한 느낌이면 어떨까 싶었다. 빨간색은 더욱 빨갛게, 노란색도 더욱 짙은 노란색이 필요했다. 포구 마을의 집들도 실제보다 더 어두운 색으로 만들었다.”
포구 마을보다 더욱 신경쓴 것은 배였다. <혈의 누>에는 두 대의 배가 등장한다. 하나는 종이를 뭍으로 운반하는 수송선이고, 다른 하나는 원규 일행이 타고 섬으로 들어오는 군선이다. 민언옥 미술감독은 배를 만들기 위해 전국의 배 박물관을 다 뒤지고 다녔다.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모든 종류의 배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고, 중국과 서양의 배도 참조했다. “배는 현실 세계와 동화도를 연결하는 통로다. 수송선이 불에 타면서 사건이 시작되는 만큼 무척 중요했다. 나는 같은 배라도 비례와 크기, 색과 두께감을 영화에 맞게 변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를 만드는 전문 목수들을 상대하려면 먼저 배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제작팀은 직접 배를 디자인하고 설계했다. “영화는 활기 찬 축제에서 시작한다. 그건 과잉의 이미지다. 마을 전체가 과잉과 탐욕으로 인해 망가지는 거니까. 축제는 배가 불에 타면서 끝나버린다. 원규 일행이 포구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불탄 수송선이 상징하는 마을의 정서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수송선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 뼈를 드러낸 공룡 시체가 나뒹굴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원규 일행의 군선은 보통 배보다 길고 크게 디자인됐다. “군선 역시 과잉의 이미지를 반영해야 했다. 보통 배보다 더 길고 크게 설계했다. 하지만 망망대해 위에 띄워놓으니 오히려 작아 보였다. 그런 대조적인 느낌이 좋았다.”
제지소와 만신당
<혈의 누>의 핵심 공간은 제지소다. 이곳은 마치 산업 혁명 시대의 공장처럼 기능하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이곳에서 노동하고 부를 쌓고 잉여 가치를 낳고 계급적으로 분화된다. 과학 기술이 지배하고 합리적인 노동 행위가 벌어지는 계몽의 공간인 것이다. 19세기 초반 조선에도 이미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싹트기 시작했던 산업혁명의 기운이 있었다? 만일 사실이라면 <혈의 누>는 역사 사회학적으로도 상당히 혁신적인 해석을 반영한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조선 후기에 이런 공장 형태의 제지업이 번성했다는 사료는 찾지 못했다. 이원재 작가는 제지업을 풀어나가기 위해 종이에 대해 따로 조사를 해나갔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자료에는 당시 종이가 대부분 가내 수공업 형태로 제작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극중 제지소와 관련된 스토리는 사실보다 상상력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셈이다.
제지소 세트를 짓는 데는 더욱 많은 자료와 상상력이 필요했다. 민언옥 감독은 디자인을 위해 전주와 안동 등지의 종이 박물관을 찾아 다녔다. 종이를 찌고 말리는 과정에 동원되는 기구와 절차도 파악해야 했다. 역시 가내 수공업에 관련된 자료가 대다수였다. 민언옥 감독은 사실적인 건축 자료를 응용하기로 했다. 제지소 내부는 2층이어야 한다. 옛날에 그런 가옥이 있었던가? 다행히 있었다. 그런 건물이 있었다는 자신감으로 밀어붙였다. “제지소 건물에 스토리가 많아야 했다. 그 건물 자체가 강 객주, 안 보이는 또 다른 원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지소 내부의 염료 통은 강 객주의 눈과 같은 것이어야 했다.” 제지소 외부는 나무를 좁게 잘라 이어붙이고 가시 같은 뾰족한 요소로 거친 느낌을 강조했다. 산을 깎아 세운 수백 개의 종이 건조대에는 흰 종이를 널어놓은 뒤 피비로 물들여 극적인 효과를 낳도록 디자인했다. 제지소 내부로 들어가면 더 복잡하다. 내부 세트는 나중에 확장 공사를 해서 다시 지은 것. 도르래와 거중기, 지게와 수레가 밧줄로 이리저리 얽혀 있다. 상당수의 기구와 소품을 새로 제작하고, 엑스트라들에게 이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물건을 어떻게 운반하느냐도 중요했다. 건물을 완성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움직임이니까. 사람들이 물건을 운반하면서 생기는 움직임과 땀이야말로 이 영화의 에너지라고 생각했다.”
<혈의 누>에는 이성과 비이성, 합리와 불합리, 유교와 샤머니즘이 곳곳에서 충돌한다. 만신(최지나)은 바로 후자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동화도의 정신적 의지처인 만신은 강 객주의 저주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과학적인 수사를 하려는 원규가 의구심을 갖도록 만든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 바로 오동나무 언덕과 만신당이다. 붉은색 위주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곳은 전체적으로 황량한 공간에서 일종의 악센트 역할을 한다. 동화도 마을과 만신당을 잇는 오동나무 언덕은 민언옥 감독 말마따나 “타버린 듯한” 붉은색과 노란색의 천 조각이 강렬하게 걸려 있다. 만신당 내부에는 갖가지 기묘한 탱화가 소품으로 사용됐다. “외국의 지옥도는 굉장히 무섭다. 하지만 우리나라 탱화들은 천진한 편이다. 민화와 무속 자료를 변형해 새로 디자인한 탱화들에서도 그런 느낌을 강조했다.”
색의 상징
아무리 공간 디자인이 훌륭하다 해도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면 헛일이다. <혈의 누> 제작진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민언옥 미술감독은 “결국 이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혈의 누>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은 사람의 욕심과 이기적인 애증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인물의 직업과 캐릭터에 따라 의상의 색조를 달리 설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동화도 마을 사람들은 ‘백의 민족’이 아니다. “햇빛에 탄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색이 필요했다. 제지소 사람들은 난색 계열의 옷을 입는다. “마을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무리로 움직이며 다닌다. 대지와 같은 존재이므로 따뜻한 색이 어울린다. 반면 선원들은 푸른색 계열의 의상이다.” 원규는 짙은 색의 관복을 입으며, 인권은 드라마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색의 옷을 갈아 입는다. 흥미로운 것은 검은색과 흰색의 사용이다. 화공인 두호는 염료를 채취하고 색을 만지는 일을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모든 색을 다 섞었을 때 나오는 검은색 옷을 입는다. 검정은 감춰진 비밀과 사건의 미스터리를 반영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반면 흰색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된다. “감정이 미니멀하거나 정체를 숨기고 있는 독특한 캐릭터에 흰색을 썼다. 김치성 대감이나 원규와 추격전을 벌이는 용의자가 바로 그런 경우다.”
<혈의 누>는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다. 물론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 별 무리는 없다. 하지만 작가와 디자이너가 숨겨놓은 갖가지 설정과 상징을 이해한다면 더욱 유익한 감상이 될 것이다. 동화도를 위협하는 원혼은 왜 하필이면 ‘객주’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까. 플롯 전개의 복병 같은 인물인 원규의 아버지는 왜 ‘토포사’로 전국을 떠돌았을까. 희생자들은 왜 천주교도를 살해한 방법 그대로 죽임을 당했을까. 말을 타고 달리는 살인 용의자는 왜 데드 마스크 같은 흰 가면을 썼는가. 김치성 대감의 방에 놓인 병풍의 글씨는 왜 꼬장꼬장해 보이는 초서체인가. 하늘에서는 왜 피비가 내리는가. 정사에서 물리도록 다뤄진 왕족과 사대부의 그늘을 과감히 탈피해보자. 상인과 군관, 퇴락한 양반과 땀에 젖은 평민이 탐욕의 이전투구를 벌이는 역사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보자. 이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5월 4일 밝혀진다.
한선희 기자 

기사제공 :  FLIM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