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존재론 핵심 다이드 : 시간과 경험을 말한다]
이정우
현대철학은 시간과 우연, 다양성 차이를 주요하게 다룬다.
기존의 철학적 선입견으로 본다면 우리의 의지를 방해하는 것, 이성과 반대되는 것들이 오히려 현대철학에서는 직면하려고 한다. 우리가 보통 근대철학은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데 비해 현대 철학은 예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이유는 근대철학은 보편성, 객관성들을 추구한 근대 이성주의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과학과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현대 철학은 우연, 다양성, 차이 등을 그것 자체로 드러내려 하기 때문에 예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이해를 하되 이성에 순치(_)는게 아니라 그 존재를 드러내려 했다.
기존의 철학 체계들은 우연과 같은 개념을 비본질적(inessential)인 것으로 치부해 왔다. 정말 본질적인 것은 시간을 초월하고 보편적이며 영원한 것이고 우연한 것은 세계의 껍데기, 그림자, 비본질적이라고 치부해왔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으로 흡수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왜 현대 존재론의 출발점이 생성과 시간일까? 현대 존재론의 출발점은 becoming으로 시간과 관련된다. 전통 존재론이 'be'의 존재론이라면 현대 존재론은 'becoming'의 존재론이다. 전통 존재론이 영원을 추구하는 철학이라면, 현대 존재론은 시간을 사유하는 철학이다. 현대 존재론은 기본적으로 '생성 존재론'이다. 이성이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시간'이다. 공간은 나름대로 분석하기가 쉽다. 공간은 가역적이나 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음) 공간은 조작이 가능하지만 시간은 조작할 수 없다. 시간은 근본적으로 우연이나 불투명성의 근원이다. 그 시간을 순치시키는 방식인 시계, 시계는 시간의 공간화를 나타낸다. 그리고 법칙. 법칙은 세계가 변하하는 패턴을 읽어냄으로써 미래에 대처하려고 한다. 또 점치는 행위. 점을 치는 행위는 불투명한 타자로서의 시간을 내부화시키는 것이다. 또 언어. 언어는 흘러가는 말들을 봉쇄시킨다. 음반. 한번 들으면 사라지는 음악을 붙잡아 둔다. 전부 인간이 다루기 힘든 시간을 다루어 보려는 노력들이다.
과학기술은 시간을 순치시키는데 노력을 쏟고, 인문학은 시간을 직시하려고 한다. 시간을 어떻게든 직시하고, 그 의미에 주목한다. 시간을 핵심에 놓고 나아가는 존재론이 생성 존재론이다. 생성 존재론의 핵심적인 인물은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이 있다. 니체와 베르그송이 기틀을 마련했다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이 존재론을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맥락속에 넣을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생성, 베르그송이 말하는 지속,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과정,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과 차이가 전통 존재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생성 존재론의 기본 개념들이다. 이런 개념들이 지향점은 존재론을 생성과 지속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대 형이상학자들, 존재론자들은 경험을 종합하거나 구성하기보다 그것의 생생한 존재 자체로서 만나고자 했다. 전통적인 존재론은 경험을 넘어서고자 했다. 우리가 말하는 경험은 투명하지가? 않다. 경험은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투명하지가 않다. 아, 그랬었구나. 하며 뒤늦게 이해하기가 일쑤다. 현대 존재론자들의 비판점은 불투명한 경험들을 추상적으로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위해 경험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있다. 물론 원칙적으로 현대 존재론은 우리가 경험에 충실할 것을 권한다. 현대 존재론은 경험을 경험 자체로 만나게 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이 경험들을 구성적인 틀 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경험 자체로 만나게 되는 방식을 강조한다.
들뢰즈가 자주 말하는 단어 : rencontre 마주치다. (경험 자체로 만나기) 진정한 의미에서 마주침을 경험한 사람을 별로 없을 것. 우리가 만나는 사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내부화 되었으므로 진정한 마주침을 경험하기 어렵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사물을 만난 적이 없다." 이미 우리 지각체계와 인식, 기호체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만 만난다. 우리는 세계를 우리의 상징계 속에 포섭함으로써 사물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sign)를 만난다. 들뢰즈는 우리의 진정함 경험이 '마주침'에 있다고 보았다. 들뢰즈의 책 <프루스트와 기호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마들렌 체험'은 마주침과 관련한 무의지적 기억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로의 질감, 나무, 피아노 소리 등. 이때의 기호들은 우리가 쓰는 언어와 같은 기호들이 아니라 철학같은. 무엇인가를 사유하게 만드는 징후symptomes를 의미한다. 징후들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호들/징후들은 사유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