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그에 응해줄 구체적인 실체, 어떤 확실한 존재가 없을 땐 훨씬 경험하기 쉬운 어떤 감정인 듯 보였다.
p.19
이렇게 벤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 특유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상대에게 전념하지 못하는 사람을, 무관심한 사람을, 미지의 운명 혹은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의 힘겨움을.
그리고 직시하게 되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고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연인들의 첫 번째 기대가 실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깨닫는 순간, 그 사랑은 최대의 시련과 맞닥뜨린다는 사실을.
p.61
거듭한 실수와 자신의 헛된 자만심 때문에 결국은 이렇게 별 볼일 없는 중년이 되고 만 것에 대해, 어린 날 그를 믿어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p.69
지하철 안에서 그는 남은 저녁시간을 근사하게 보내는 공상에 잠겼다. 커다란 백조 등에 올라타면 새는 날개를 퍼덕여 하늘을 날아 새하얀 솜털로 채워진 방에 사뿐히 그를 내려놓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아도 되고,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낮 동안 제쳐두었거나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스스로 꼴을 갖춰나갈 것이다. 재스민이나 라벤더향이 풍겨도 좋겠다. 모든 것이 더없이 부드럽고 순결하다. 종이 한 묶음을 옆에 놓고 고민거리들을 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알프스산맥의 맑은 물과 연결된 기다란 빨대, 백포도주 한 잔 또는 우유 한 잔, 거기에 스프와 회 몇 점이 담긴 쟁반이 천장에서 내려오면 금상첨화겠다.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수영장에 발을 담그면, 형체는 없지만 모든 걸 다 받아줄 것만 같은 너그러운 두 팔이 그를 감싸안으며 안쓰러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감미롭게 속삭일 것이다. '이해해...'
하지만 현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두 아이, 조금 지친 아내, 그리고 모종의 위기.
p.71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권리긴 하지만, 인류 대다수에게, 특히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라면 가급적 그런 끔찍한 특권을 행사해선 안된다는 충고가 늘 따라붙는다.
p.95
자리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미처 해결되지 않은 불안감의 응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덮쳐왔다. 그때마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자신에게 더 많은 기회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강렬하게 질투하고, 더 처참한 수모를 맛보고, 일과 관련된 각종 위기의 시나리오를 음미할 기회와 시간. 벤의 불면증은 그의 의식이 낮 동안 분주함을 핑계로 한쪽 구석에 밀어 놓을 수 있었던 모든 근심걱정들에 대해 그의 무의식이 행하는 복수였다.
p.132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진실 말이다.
p.159
벤은 이렇다 할 만한 사건이라곤 없는 자신의 인생을 종종 안타까운 심정으로 돌이켜보았다. 수많은 소설들의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강력한 사건, 아슬아슬하고 드라마틱하고 가슴에 와닿고 의미 있는 일들이 그의 삶에선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갈림길에 서본 적도 없고, 논리가 확장되거나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계시의 순간을 체험해 본 적도 없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아보려 할 때마다 그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혼란, 기쁨, 불안, 욕망, 열망, 비애 그리고 권태라는 테마로 엉성하게 엮인 단편적인 사건들 무더기였다.
...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건들과 모호하지 않은 결론으로 이루어진, 남이 만들어놓은 규격화된 이야기를 자기 삶에서 기대한 본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일이 스스로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놓인 어렴풋한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도, 이 가느다란 끈들을 이어 성숙한 이야기로 발전시키는 것도 자신의 몫임을 인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