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루에 진지한 사유 하나씩
- 거짓말과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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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에서처럼 당신은 한때 아주 익숙했지만 원래도 몰랐고 결국 끝까지 모를 사람을 마주하고 가진 것을 전부 꺼내놓는다. 당신의 부모와 자녀, 당신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를 그들은 모두 이해하며 들을 것이다. 그들도 생활의 압박감과 직장에서의 실패, 갈 길 없는 막막함 등 수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단지 이 모든 것들이 당신과 무관할 뿐이다. 당신의 하소연이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들과 전혀 무관하듯이.
이런 관계는 대단히 바람직하다. 쉽게 닦이는 냄비처럼, 더러운 기름이 잔뜩 묻고 음식찌꺼기가 끼어있을지라도 가볍게 씻어내기만 하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을 만큼 금세 깨끗하고 매끄러운 표면을 회복한다.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닐까. 어떤 부담도 없기 때문에 서로 솔직하고 진지할 수 있다. (적어도 당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솔직함과 성실함에는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육지에서 이런 친구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학교 친구들은 당신의 성장을 지켜봤고 직장 동료들은 당신의 다른 직장 동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을 마주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당신은 지상의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당신에게는 감추는 것이 있고 남겨두는 것이 있게 된다. 바다는 자유로운데, 당신은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는 일들마저 거짓말이라고 의심한다. 하지만 그 일들은 의심으로 인해 더 사실적이다. 의심이야말로 사람들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바다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자신이 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 짝사랑
짝사랑이라고 해서 장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은 소크라테스가 한 제자를 교훈할 때 했던 말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보다 신성하다. 신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구하는 사람의 편이기 때문이다.
- 아무도 없는 방
호퍼가 그린 집은 안과 밖을 막론하고 극도로 꺠끗하다. 그가 그린 인물화만큼이나 무정하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그린 마지막 작품 <빈 방의 햇빛>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간판같은 광선만 남아 있고 방바닥과 벽에는 그림자가 만들어낸 기하학적 편린 몇 조각이 있을 뿐이다. 창문도 보인다. 창밖의 나무 그늘 아래에는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침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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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의 햇빛>은 호퍼의 예언이자 호퍼 자신을 위해 쓴 추도사다. 사람이 떠나고 방은 비지만 햇빛은 여전히 쏟아져 들어온다. 그가 떠나도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 이사를 한 뒤
알고 보니 이사는 이런 것이었다. 책장과 옷장이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바닥에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자국들은 물건을 들어낸 다음에야 이제는 가고 없는 존재의 분량과 시간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살인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의 시산은 일찌감치 옮겨졌지만 그 형상은 바닥에 하얀 분필로 그린 선으로 남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선명하게.
- 좌절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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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책은 스스로 잘 이해하는 책일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그 책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 그 안에 담긴 모든 글자와 부호를 탐닉하게 된다.
- 싸늘한 폐허
"폐허에서 살고 있다."
- 폐허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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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 것 같다. 알고 보니 폐허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쇠락은 오로지 나에게만 있었다.
- 로맨스 영화
<노팅힐>
-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까
우리는 얼마나 오래 어쩌면 받지 못할지도 모를 문자메시지를 기다릴 수 있을까.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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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실시간'의 시대에는 누군가와 하루라도 연락이 두절되면 그날로 실종신고가 될 것이다. 우리는 문자메시지를 통한 실시간 접속에 길들여져 있고 전화를 걸면 누군가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기대에 익숙해져 있다. 전 세계 10억 개의 휴대전화가 쏟아내는 전파가 무한한 네트워크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지구 표면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이 거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모두들 누군가 찾고 있다.
이런 네트워크에서 벗어나는 일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발사한 신호가 되돌아오지 않고 번호를 누른 뒤에도 언제까지나 긴 신호음만 들리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 별의 목소리
마코토 신카이 <별의 목소리>
- 시간 속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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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편지를 한 통 읽는 것은 두 개의 시간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시간점과 편지를 읽은 순간의 시간점이다. 한 통의 편지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횡단한다. 하지만 실시간 통신 기술이 시간의 간격을 소멸시켜버렸다. 심지어 시간대의 틀을 허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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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원래 일종의 시간 현상이고 연애편지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징이다. 시간의 확장이 소실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