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냥 탐색하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는 별들과 책들에서 탐색하지 않고 그저 내 안에서 피가 속삭이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 어린시절에 대해, 아버지와 어머니 곁의 안전함, 부모님을 향한 사랑, 온화하고 밝고 좋은 환경에서 충분히 놀면서 보낸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멋지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일이 되리라. 하지만 내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이르기 위해 내디딘 삶의 발걸음들 뿐이다.
"그렇게 똑똑한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 전혀 없지.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 뿐이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건 최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자신 속으로 완전히 기어들어갈 줄 알아야 하는데."
정원엔 향기가 사라지고, 숲은 유혹하지 않고, 내 주변의 세계는 낡은 상품의 떨이판매같이 김빠지고 자극이 없고, 책들은 종이, 음악은 소음이 되어버렸다. 가을 나무 주변으로 그렇게 잎사귀가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비가 나무에 내리고, 햇빛이나 서리도 내리지만, 나무는 천천히 가장 내밀하고 가장 깊은 속으로 점점 더 움츠러든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린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시스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열중해 있었고, 언제나 나 자신과 함께였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한 조각 삶을 살아봤으면, 내 안에서 무언가를 세상으로 내보냈으면, 세상과 관계를 맺고 투쟁도 해봤으면 하고 간절히 원했다.
영혼의 본질은 영원성이며 우리는 그 본질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 창조의 힘으로 느껴진다.
이런 학술적인 태도는 나의 내면을 격려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게 도움이 된 것은 내가 나 자신의 내면에서 앞으로 나아갔음을 보는 것, 내 독특한 꿈과 생각과 예감들을 점점 더 신뢰하게 된 것, 그리고 내 안에 지닌 힘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공격했을 때, 나는 방어력이 있는 강한 사람을 때린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조용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 침묵하면서 항복해버리는 사람을 때렸던 것이다.
각자에게 '직분'이 주어져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직접 그것을 고르거나 고쳐쓰거나 멋대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계에 어떤 그 새로운 것을 부여하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 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 뿐이다. 나는 자연의 내던짐이었다. 불확실성을 향한, 어쩌면 새로움을 향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내던짐이었다. 그리고 태고의 깊이에서 나오는 이 내던짐이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내 안에서 그 의지를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나의 의지로 삼는 것, 그것만이 내 소명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이마에 표를 지닌 우리에게는 미래의 형성을 걱정하는 일이 의무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신앙, 그 모든 치유론이 처음부터 쓸모가 없고 죽은 것이었다. 우리 각자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일, 자신 안에서 작동하는 자연의 소질에 완전히 어울리게 되어 자연의 의지에 맞게 사는 일, 불확실한 미래가 가져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일만이 우리의 의무이며 운명이라고 느꼈다.
그는 사랑했고, 그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자신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거리와 집, 사람과 여러 가지 시설, 도서관과 강의실 들이 있었지만 이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동화와 꿈이 살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과 단절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주 생각과 대화를 통해 세상 한가운데서 살았는데, 다만 다른 영역에서 살았을 뿐이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를 통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방법이 다름으로써만 나뉘어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 하나의 섬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으로, 적어도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존재로 사는 것이었다.
+ 의식과 무의식, 에고와 참 나
우리가 '나'라고 말하는 존재는 바로 의식에서의 '나'이다. 융은 이 일상의 나를 라틴어를 이용하여 '에고(ego)'라 부른다. 의식에 기반한 '에고'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우리의 기억과 욕망과 일상생활은 모두 에고의 영역에 속한다. 그에 반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진짜 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자기(The self)'다. 의식과 무의식의 소리도 함께 듣는 진짜 나, '참 나(眞我)'이다. 피스토리우스의 설명을 참조하라(127쪽). 특히 우리는 불교 용어를 이용하면 이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아집을 버리고 참 나를 찾으라'는 가르침에서 아집은 에고의 집착이다. 삶의 의미는 아집에 있지 않고 참 나를 찾아 그에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은 싱클레어의 모토이기도 하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려고 했을 뿐이다."